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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동 민주화, 정치적 공론장으로서 주민자치회의 역할 재조명

엄기홍 기자 | 2025.09.30 | 조회 59

정치적 중립이라는 탈정치화의 함정…‘아래로부터의 정치’를 가능하게 할 법적‧제도적 전환 모색

출처: 시민정치연구

출처: 시민정치연구

윤왕희 성균관대 미래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읍·면·동 민주화 실태에 관한 연구」에서, 현행 주민자치회 제도가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허용하지 않는 탈정치적 구조임을 비판하며, 주민자치회가 정치적 공론장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는 주민자치회의 법제도적 환경, 행정과의 관계, 정치적 중립 요구의 모순 등을 중심으로 읍·면·동 수준에서의 민주주의 실현 가능성을 분석했다.

이 연구는 우리 사회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짚는 것에서 출발한다. 국민이 국회를 직접 청원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창구는 대부분 대통령 탄핵이나 정당 해산 요구 등 중앙정치 중심의 적대적 동원에 활용되고 있다. 이는 정치적 참여가 중앙집중적 갈등에 매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연구는 읍·면·동이라는 지방자치단체의 하부 행정단위에 주목한다. 한국의 읍·면·동은 자치계층은 아니지만, 인구 규모나 기능 측면에서 선진국의 기초자치단체에 필적할 만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읍·면·동의 민주화 수준은 낮고, 주민자치회는 여전히 행정기관의 하부 기구로 운영되는 현실이다.

법적으로도 주민자치에 대한 보장은 미흡하다. 헌법과 지방자치법은 주민을 단순히 선거권을 가진 행정 객체로 규정하고 있을 뿐, 주권적 정치 주체로서 명시하지 않는다. 「지방자치법」상 주민의 권리는 지방의회 선거나 공공시설 이용에 국한되며, 읍·면·동 수준의 주민 참여에 대한 규정은 미비하다.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이 주민자치회 설치를 가능하게 하고 있지만, 구성과 운영은 여전히 시장이나 군수, 읍·면·동장이 주도한다는 점에서 자율성이 결여돼 있다.

행정안전부가 제시한 ‘주민자치회 표준조례안’도 자치회 설치의 주체를 행정기관으로 명시하고 있고, 위원 선정 또한 읍·면·동장이 위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조는 자치회를 행정의 하부기구로 고착화시키며, 실질적인 자치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표면적으로는 주민참여 활성화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관치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 중립 요구다. 주민자치회 위원은 정치 활동 일체를 금지당하며, 정치적 표현이나 의견 개진조차 제약받는다. 이는 ‘특정 정당 지지 금지’라는 공직선거법의 범위를 넘어서, 주민자치 자체를 탈정치화하려는 경향으로 읽힌다. 연구는 이러한 규정이 주민자치의 본질을 훼손한다고 지적하며, 정치적 중립과 선거 중립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 운영 사례에서도 주민자치회의 당파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기초단체장의 당적이 주민자치회의 구성과 운영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선거가 임박하면 위원들이 직을 내려놓고 선거운동에 나섰다가 선거 후 다시 위촉되는 순환 구조가 존재한다. 이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 아래 위에서 부과되는 정치만을 용인하고, 아래로부터의 정치 참여는 배제하는 모순된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주민자치는 행정의 일부가 아니라 정치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하며,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정치 주체가 되어 생활정치에 참여해야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 주장이다. 하버마스의 ‘정치적 공론장’ 개념을 지역사회에 적용할 때, 주민자치회는 단순한 행정 파트너가 아니라 지역 민주주의의 핵심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읍·면·동 단위의 민주화가 지역 민주주의뿐 아니라 국가 수준의 민주주의 성숙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주민자치회가 정치적 공론장으로 기능하려면, 법제도의 전환이 필요하며, 행정이 아닌 주민 주도적 구조로 운영되어야 한다. 중앙정치 중심의 적대적 동원에서 벗어나,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정치적 삶을 조직할 수 있어야만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 앞으로의 과제는, 주민자치회를 정치적 중립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생활정치의 출발점이자 민주적 혁신의 기반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에 그치지 않고, 정치 주체로서 주민의 인식 변화와 참여를 동반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논문: https://doi.org/10.54968/civicpol.2025.10.3
유튜브: https://youtu.be/iDw3WADMe1Y

엄기홍 기자 | theaipen.officia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