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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전쟁의 상처, 지도자의 전쟁 결단을 바꾸다

엄기홍 기자 | 2025.06.12 | 조회 20

지도자의 유년기 전쟁 트라우마가 무력 충돌 개시에 미치는 보수적 영향 분석

출처: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출처: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2024년 국제학술지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 외세의 침공을 겪으며 가족을 잃거나 피란을 경험한 지도자는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국가 간 무력 충돌을 개시할 가능성이 유의미하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는 미국 워싱턴대학교 소속 김동진 교수가 수행했으며, 1872년부터 2010년까지 49개국, 249명의 지도자를 대상으로 분석했다.

국제관계 연구는 오랫동안 전쟁의 발발 원인을 구조적 변수-국제체제의 무정부성, 세력균형, 정체성 갈등 등-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인의 경험이 정책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주목하는 연구가 늘고 있다. 김동진 교수의 이번 연구는 그러한 흐름 속에서 특히 지도자의 유년기 전쟁 경험이라는 미개척 영역에 집중했다.

이 연구는 두 상반된 가설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군사적 보수주의' 가설이다. 유년기에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한 지도자는 무력 사용의 대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군사 충돌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반면, '군국주의' 가설은 그와 반대로, 무력에 노출되었지만 대응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무력감이 성인이 되어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전이되어 오히려 공격적 성향을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적 대립을 실증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연구자는 지도자의 유년 시절 외세 침공 경험 가운데에서도 가족의 사망, 부상, 피난 등 직접적 피해 경험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집단을 나누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패널 데이터를 통해 군사 분쟁 개시 여부와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트라우마를 경험한 지도자는 무력 분쟁을 개시할 확률이 평균 16.1%p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치적 제약이 적은 비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효과가 최대 25.3%p까지 컸다.

반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다. 이는 제도적 견제 장치가 개인의 정책 선호를 실현하는 데 제약을 주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연구자는 이러한 결과가 지도자의 유년기 경험이 정치 제도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해석한다.

흥미로운 비교 사례로는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전 총리가 있다. 러시아 제국 시절 유대인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망명했던 메이어는 강한 국방력과 보복 의지를 강조하며 임기 중 공격적 대외 정책을 펼친 바 있다. 하지만 연구자는 이 같은 사례가 일반화될 수는 없다고 본다. 분석 결과는 오히려 전쟁의 고통을 직접 경험한 지도자가 강력한 무력 대응보다 외교적 해결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지한다.

이 연구는 선행 연구와도 차별점을 갖는다. 기존에는 군 복무 경험이나 반군 활동과 같은 '성인기'의 폭력 경험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본 연구는 '유년기'라는 결정적 시기에 형성된 정서와 신념이 외교 정책에 어떤 장기적 영향을 주는지를 조망했다. 또한 기존 연구에서 자주 사용된 단순한 국가 단위 전쟁 노출 여부가 아니라, 개인의 직접적 피해 경험을 정밀하게 측정했다는 점에서 데이터의 질도 높다.

이번 연구는 국가안보 정책 결정에 있어 지도자의 개인적 이력, 특히 유년기의 전쟁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의 상처가 지도자의 손끝을 무겁게 만들 수도, 가볍게 만들 수도 있는 셈이다. 향후 이와 같은 분석 틀은 무력 사용뿐만 아니라 군비 증강, 외교 전략, 심지어는 지도자의 대국 인식에도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최근 외세 침공을 겪은 지역의 미래 지도자들이 어떠한 외교 안보 정책을 펼칠지 예측하려면, 그들의 유년기 기억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전쟁은 끝났을지 몰라도, 그것이 남긴 흔적은 정치의 무대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논문: https://doi.org/10.1093/isq/sqae069
유튜브: https://youtu.be/ih-Tg0zqK78

엄기홍 기자 | theaipen.officia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