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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정권의 ‘적 만들기’: 전쟁 기억을 현재 권력으로 바꾸는 북한의 통치 전략

엄기홍 기자 | 2026.03.09 | 조회 8

1945~1953년 전쟁 서사의 현대적 변용과 ‘상시 위기’ 정치

출처: 국가전략

출처: 국가전략

북한 체제는 건국 이후 외부의 적을 강조하는 정치 담론을 통해 내부 결속을 유지해 왔다. 특히 6·25 전쟁 시기에 형성된 반미·반남 서사는 북한 정치의 핵심 기억 구조로 자리 잡았다. 최근 연구는 김정은 정권이 이러한 과거 서사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정치 환경에 맞게 재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지도자인 김정은은 과거 전쟁 기억을 현재적 위협과 결합시키며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고 있다.

북한 정치에서 ‘적’의 존재는 단순한 외교적 갈등이 아니라 체제 정당성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해 왔다. 해방 이후 북한은 미국과 남한을 단순한 전쟁 상대가 아니라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기억해야 할 ‘적대국’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서사는 교육, 언론, 문화 매체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전달되며 집단적 기억으로 고착됐다.

특히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3년 정전에 이르는 시기는 북한 체제가 적대국 서사를 체계적으로 구축한 시기였다. 북한의 공식 담론은 미군정과 남한 정권을 민족 분단과 착취의 주범으로 규정했고, 전쟁 책임 역시 외세와 그 대리 세력에 귀속시켰다. 이러한 설명 구조 속에서 미국은 절대적 적으로, 남한은 괴뢰 정권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서사는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라 정치적 기억으로 재구성됐다. 전쟁 피해와 투쟁의 경험은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공유해야 할 집단 기억으로 강조됐다. 이러한 기억 정치의 결과로 반미·반남 담론은 북한 사회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학습되고 내면화됐다.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정치적 기억 형성은 세 가지 구조적 요소와 결합했다. 첫째는 전체주의적 권력 구조다. 북한 체제는 당·정·군의 일원적 지휘체계를 통해 사회 전반을 통제하며 외부 위협을 권력 집중의 근거로 활용했다. 둘째는 기억의 정치다. 과거 사건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선택적으로 재구성되고 현재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셋째는 세뇌 전략이다. 교육, 언론, 문화 매체를 통한 반복적 메시지 전달이 주민들의 인식 구조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구조는 김정은 시대에도 지속되고 있다. 김정은은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는 한계를 안고 등장했다. 북한 정치에서 전쟁 경험은 지도자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에, 김정은에게는 이를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김정은 정권은 헌법 개정과 선전 활동을 통해 항일과 전쟁 세대의 유산을 제도화했다. 헌법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영원한 지도자로 규정하며, 김정은이 이들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는 지도자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는 전쟁 경험의 부재를 상징적 계승으로 보완하는 기능을 했다.

또한 김정은 정권은 과거 전쟁 서사를 현재 정치 환경과 연결시키는 전략을 활용했다. 한미연합훈련이나 대북 제재는 과거 전쟁의 연속으로 해석되며,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식이 주민들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담론은 사회 전반에 ‘상시 위기’ 의식을 확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남한은 단순한 외교적 경쟁 상대가 아니라 북한 체제의 존립을 위협하는 존재로 재정의된다. 연구에서는 이를 ‘존재론적 적대’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적대 관계는 특정 사건이나 정책 때문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존재와 직결된 문제로 이해된다. 이러한 담론 전략은 군사행동과 결합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미사일 시험 발사, 군사 훈련, 대규모 열병식 등은 단순한 군사적 행위가 아니라 주민들에게 위기 상황을 체감하게 만드는 정치적 장치로 작동한다. 이를 통해 전쟁 기억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현실로 재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에는 한계도 존재한다. 북한 사회에서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새로운 세대에게 과거 기억을 동일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또한 외부 정보의 유입과 주민들의 생활 경험은 공식 담론과 충돌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 연구는 북한의 적대국 세뇌 전략이 단순한 선전이나 이념 교육이 아니라 체제 유지의 핵심 메커니즘임을 보여준다. 김정은 정권은 과거 전쟁 기억을 현재의 위협과 결합시키며 내부 결속과 대중 동원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북한 정치에서 적대국 담론은 역사적 서사의 반복이 아니라 현대적 통치 기술로 기능한다.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북한 체제의 정치적 안정성과 대외 전략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기억 정치와 위기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거나 약화될 것인지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다.

📄 논문: https://doi.org/10.35390/sejong.32.1.2026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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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홍 기자 | theaipen.officia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