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은 국가의 우선순위와 권력관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문서다. 그런데 한국 정치에서 예산은 늘 ‘전쟁’처럼 묘사되지만, 이 연구가 보여주는 현실은 다르다. 국회는 정부가 짜온 예산안을 두고 거시적 방향을 재설계하기보다, 제한된 시간 안에 세부 항목을 미시적으로 조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민주화 이후 국회의 권한이 전반적으로 확대되었음에도 왜 예산영역만큼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는가. 이 연구는 역사적 제도주의의 관점에서 제1공화국부터 제6공화국까지 국회 예산심의제도의 형성과 변화, 그리고 그 제도에서 비롯된 국회의 행태를 분석한다. 결론은 명확하다. 국회 예산심의제도는 민주화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재설계되지 않았고, 권한과 절차는 대체로 유지된 반면 심의 대상만 확대되면서 오히려 형식화와 파편화가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의 출발점은 한국 국회의 예산심의가 겉으로 보이는 정치적 공방과 달리 실제로는 매우 제한적이라는 문제의식이다. 예산은 국가가 무엇에 자원을 배분하고 어떤 정책을 우선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문서다. 그럼에도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총액이나 분야별 우선순위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다루기보다, 일부 프로그램이나 하위 항목을 중심으로 상향식으로 집계하는 방식의 심의행태를 보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예산정치의 외형은 거칠고 치열해 보이지만, 실질은 개별 의원들의 파편적 대응과 정당 지도부 중심의 최종 협상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수치로도 뒷받침된다. 연구에 따르면 1989년부터 2025년까지 정부가 편성한 일반회계 세출예산안은 매년 평균적으로 약 10%p씩 증가했지만, 국회 예산심의를 통해 조정된 금액의 순증감률은 평균 약 0.05%p, 약 0.3조 원에 불과하다. 예산심의에 투입되는 시간 역시 충분하지 않다. 상임위 예비심사는 평균 4.3일, 예결위 종합심사는 15.5일, 본회의 심의·의결은 2.1일로 합산 약 21.9일에 그친다. 방대한 재정문서를 심사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고, 그 결과 국회는 전략적 재정통제보다 단기적·미시적 대응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적 제도주의를 택한다. 핵심은 현재의 제도가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선택이 누적된 결과이며, 일단 특정 경로가 고착되면 이후 변화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는 경로의존과 경로변화의 개념을 적용해 한국 예산심의제도의 사전단계, 형성단계, 고착단계를 구분한다.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은 사전단계, 제3공화국은 형성단계,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은 고착단계로 정리된다. 그리고 제6공화국은 민주화라는 정치적 전환에도 불구하고, 예산심의제도만큼은 이전 경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운영되었다고 분석한다.
그 배경에는 무엇보다 헌법상의 예산제도가 있다. 한국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예산제도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엄격한 권력분립보다는 행정부 우위의 권력융합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 진단이다. 국회는 정부 동의 없이 지출항목을 증액하거나 신비목을 설치할 수 없고, 예산비법률주의 아래에서 예산은 법률과 같은 법적 성질을 갖지 않는다. 제6공화국 헌법은 민주화의 산물이었지만 예산제도에 관해서는 제3공화국의 틀을 대부분 유지했다. 그 결과 국회는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약 3개월의 제한된 시간 동안 사실상 감액 중심으로만 심사할 수 있는 구조에 놓였다.
여기에 선거제도도 제약으로 작용한다. 한국 국회의원들은 소선거구 단순다수제 중심의 구조 속에서 재선에 강한 동기를 가진다. 따라서 국가 전체의 장기적 재정전략보다는 지역구에 직접 귀속되는 사업예산 확보에 관심을 둘 유인이 크다. 그러나 이 연구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유인이 제도개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예산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제도, 예컨대 국회가 독자적으로 증액심사를 할 수 있는 체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는다. 이는 개별 의원의 선호보다 정당 지도부의 권한이 훨씬 강한 중앙집권적 정당체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당제도의 영향은 예산심의행태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 예산정국에서는 상임위와 예결위에서의 논의가 최종 결정을 좌우하기보다, 정부와 여야 지도부의 협상력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의원들은 상임위에서 심의하더라도 나중에는 원내대표 등 지도부가 큰 틀을 정하고, 그 안에서 일부 요구를 반영받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국회가 독자적으로 증액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도부는 의원들의 요구를 모아 정부와 협상하고, 의원들은 그 결과를 수용하는 편이 더 합리적 선택이 된다. 이것이 바로 왜 국회의원들이 예산권의 구조적 강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는지 설명하는 메커니즘이다.
의회제도 역시 중요한 제약이다. 한국의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상설특별위원회이지만 다른 상임위와 겸임하며, 상임위 예비심사-예결위 종합심사-본회의 의결이라는 3단계 구조 속에서 독점적 권한을 확보하기 어렵다. 미국 의회처럼 예산위원회나 세출위원회가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재정통제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와 달리, 한국의 예결위는 각 상임위 활동의 연장선에서 또다시 세부항목을 심의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거시적 재정총량과 분야 간 배분을 전략적으로 조정하는 기관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제6공화국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저자는 권한이나 절차의 근본적 변화보다, 심의 대상의 확대가 두드러졌다고 본다. 절차와 일정의 측면에서 보면, 상임위 예비심사-예결위 종합심사-본회의 의결의 3단계 구조는 유지되었다.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주로 예결위의 상설화, 전문위원 검토보고 공식화, 예산안 제출시기의 조정, 국회선진화법에 따른 자동부의제 도입 같은 부분적 조정이었다. 즉 정부 예산편성권을 사전에 통제하거나, 중장기 계획 수립 단계부터 국회가 개입하는 구조는 도입되지 않았다.
권한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제6공화국의 각 국회는 대통령과 행정부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방향으로 예산심의권을 재구성하지 않았다. 상임위 예비심사 존중, 소위원회 지위 강화, 국회예산정책처 설치, 결산상 시정요구 같은 변화가 있었지만, 국회의 재정권을 근본적으로 강화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특히 제17대 국회부터 제21대 국회까지는 예산심의 권한에 관한 진지한 논의 자체가 부재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반면 심의 대상은 계속 늘어났다. 제17대 국회 이후 국가재정운용계획, 총액배분자율편성예산, 성과관리제도, 국가채무관리계획, 성인지 예산서, 성인지 결산서, 임대형 민자사업 한도액안, 예비타당성조사 결과, 세입예산 추계분석보고서, 온실가스감축인지 예산서 등 다양한 자료가 국회에 제출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국회의 정보 접근성이 높아지고 심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는 이를 국회의 권한 강화로 보지 않는다. 국회는 정부가 새로 도입한 제도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통제 장치를 마련했다기보다, 정부가 작성한 자료를 제출받아 검토하는 데 머물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회는 대상만 늘어나는 예산심의에 적응했을 뿐, 그 대상들을 활용해 재정총량과 우선순위를 재구성하는 권한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가겹(layering)’이다. 경로창조나 대체가 아니라, 기존의 제도는 유지한 채 새로운 요소를 부분적으로 덧붙이는 방식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회 예산심의제도는 바로 이런 유형의 경로진화를 겪었다. 헌법상의 예산제도, 정당제도, 선거제도, 의회제도라는 구조적 제약이 유지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의 강한 거부권이 작동하고, 국회의원들의 재량은 제한되어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새로운 재정통제 질서를 창출하기보다, 기존 틀 위에 자료 제출 의무나 부수절차를 덧붙이는 변화만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 연구의 강점은 국회가 예산권을 왜 핵심 권한으로 인식하지 못하는지를 정치제도 전반과 연결해 설명한다는 데 있다. 단순히 국회의 무능이나 태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하는지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예산은 단일안건이고 반드시 통과되어야 한다. 정부는 예산편성권과 증액 동의권을 쥐고 있다. 의원들은 재선을 위해 지역구에 관심을 두지만 공천권은 지도부가 장악한다. 예결위는 전문성과 독립성이 부족하고, 실제 협상은 지도부와 정부 사이에서 이뤄진다. 이런 맥락이 맞물리면서 국회의 예산심의는 거시적 재정정치가 아니라 파편적 조정의 장으로 남는 것이다.
물론 이 연구는 단지 진단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단기적 대안과 장기적 대안을 구분해 제시한다. 단기적으로는 현행 헌법을 유지하더라도 국회 활동과 관행을 바꾸는 방식의 개선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선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대해 국회가 장기적 자원배분의 우선순위를 정해 적극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국회예산정책처가 총액·분야·부문별 추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또한 사전예산제도를 도입해 정부 편성단계부터 국회가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입법·예산심의·결산 활동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현재의 단절적 운영을 개선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헌법 개정 없이도 국회의 거시적 재정통제 능력을 부분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된다.
장기적으로는 보다 근본적인 제도개편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핵심은 국회의 예산권 위상을 헌법 수준에서 재정립하는 것이다. 국회의 증액심사와 감액심사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거나 폐지하고, 예결위를 전문성을 가진 상임위로 전환하며, 예산법률주의를 도입해 예산의 법적 성격과 집행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대통령과 정부가 국회 의결 예산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설계해 대통령제 원리에 부합하는 견제와 균형을 재구축해야 한다고 본다. 감사원의 국회 이관도 이런 맥락에서 제안된다. 결산, 국정감사, 국정조사, 예산심의가 보다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입법부가 재정감사 수단까지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이 연구가 한국 정치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민주화 이후 한국 국회는 입법, 국정감사, 국정조사 등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왜 가장 핵심적인 국가자원 배분 권한인 예산영역에서는 여전히 행정부 우위가 지속되는가. 이 논문은 그 이유가 민주화의 미완이 아니라, 민주화 당시 헌법과 예산제도가 함께 재설계되지 않았던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미완의 설계가 선거, 정당, 의회 운영과 결합하면서 오늘날까지 경로의존적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예산을 둘러싼 정치가 늘 소란스럽지만 국회의 실질적 통제는 약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정쟁이 아니라 제도와 경로를 봐야 한다는 메시지다.
결국 이 연구의 결론은 분명하다. 한국 국회의 예산심의제도는 민주화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고, 권한과 절차는 거의 유지된 반면 심의 대상만 확대되면서 국회의 부담과 형식성만 커졌다. 역사적 제도주의의 언어로 말하면 이는 경로창조가 아니라 가겹 중심의 경로진화다. 대통령과 행정부의 강한 거부권, 헌법상 예산제도, 중앙집권적 정당, 소선거구 중심 선거제도, 예결위 구조가 결합해 국회의 예산통제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의 예산권을 실질화하려면 단순한 운영 개선만으로는 부족하다. 단기적으로는 사전예산제도, 국가재정운용계획 심의 강화, 입법·예산·결산의 연계가 필요하고, 장기적으로는 예산권의 헌법적 재설계가 필요하다. 재정권의 측면에서 입법부와 행정부가 실질적 견제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한국 대통령제의 구조적 불균형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 연구는 강하게 시사한다.
📄 논문: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4228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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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왜 예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가: 역사적 제도주의로 본 예산심의제도의 경로의존
엄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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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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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에도 바뀌지 않은 국회 예산심의의 구조와 대통령·행정부 우위의 재정질서를 추적하다
출처: 의정연구
엄기홍 기자 | theaipen.official@gmail.com